한국은 협업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부서 안에서는 과할 만큼 합니다. 부서와 부서 사이, 그리고 직급과 직급 사이가 문제입니다. 그 경계를 그은 것은 문화가 아니라 평가 제도입니다.
한국 조직은 협업을 못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협업의 정의를 다시 세우고 들여다보면 이 문장은 절반만 맞습니다. 한국 조직은 부서 안에서는 과할 만큼 협업합니다. 무너지는 자리는 부서와 부서 사이, 그리고 직급과 직급 사이입니다. 그 두 경계를 그은 것은 굳어진 문화가 아니라 평가 제도입니다.
협업은 내 결론이 바뀌는 경험입니다
회의 횟수나 공유된 자료의 양은 소통의 지표일 뿐 협업의 증거가 아닙니다. 협업은 대화가 끝난 뒤 누군가의 계획이 달라졌는가로 증명됩니다.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것은 소통이지 협업이 아닙니다.
직설적으로 조직에 두 가지를 물어야 합니다.
- 세로의 협업: 아랫사람의 의견으로 윗사람의 결론이 바뀐 적이 있는가
- 가로의 협업: 개발자의 의견 때문에 기획이 바뀐 적이 있는가
둘 중 하나라도 막혀 있다면 그 조직은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의견을 냈는데 결론이 바뀐 적이 없으면, 사람들은 곧 입을 닫습니다.
각자 잘하는 것과 함께 엮는 것은 다릅니다
각자 자기 일을 잘하는 능력과 서로 다른 일을 하나로 엮는 능력은 같은 능력이 아닙니다.
애니타 울리 연구진이 2010년 사이언스에 실은 Evidence for a Collective Intelligence Factor in the Performance of Human Groups가 이걸 숫자로 보여줍니다. 성격이 다른 여러 과제를 팀들에게 풀게 했더니, 팀 간 성과 차이의 43% 가 단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됐습니다. 이 요인은 팀원의 평균 지능(상관계수 0.15)이나 가장 똑똑한 사람의 지능(0.19)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대신 다음 둘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 사회적 감수성: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
- 발언의 균등한 분배: 직급이 낮거나 목소리가 작은 사람의 말도 반영되는 정도
뛰어난 사람을 모으는 일과 뛰어난 팀을 만드는 일은 별개입니다. 그래서 "협업을 못한다"는 진단을 업무 능력 부족으로 뭉뚱그리면 안 됩니다.
위계가 입을 막는다는 흔한 착각
흔히 한국의 높은 권력 거리가 직원들의 입을 막는다고 말합니다. 한국 중공업 27개 회사의 직원 628명을 조사한 Relationships Among Power Distance, Collectivism, Punishment, and Acquiescent, Defensive, or Prosocial Silence(2014)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 체념적 침묵 (말해봐야 안 바뀐다): 권력 거리가 높을수록 늘어났습니다
- 방어적 침묵 (말하면 내가 다친다): 권력 거리와는 관계가 없었고, 말한 뒤에 돌아오는 불이익이 늘렸습니다
회의실에서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풍경은 같지만 원인이 다르니 해법도 달라야 합니다. 두려움은 말한 뒤에 돌아오는 불이익을 없애야 풀리고, 체념은 자기 의견으로 윗사람의 결론이 바뀌는 장면을 눈앞에서 봐야 풀립니다.
그리고 체념은 윗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굳어집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바뀔 일이 없고, 바뀐 것이 없으니 다음에도 말하지 않습니다. 윗자리에서는 반대로 보입니다. 이견이 없으니 합의된 것으로 읽힙니다. 양쪽 다 진심인데 협업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꿀 생각도 없으면서 "편하게 말해보라"고 묻는 것은 그래서 중립이 아닙니다. 체념을 한 바퀴 더 돌리는 일입니다.
협업을 가로막는 딜레마: 평가표
협업이 안 된다는 진단이 나오면 조직은 소통 워크숍을 열고, 평가표에 10% 남짓한 협업 항목을 넣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부서를 넘나드는 일에 시간을 쓸수록 자기 부서 실적이 깎이는 것을 누구나 체감합니다. 연말 평가에서 "타 부서와 원활히 협조하였음"이라는 한 줄이 등급을 가르는 일은 없습니다. 직원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닙니다. 협업하지 않는 쪽이 합리적이 되도록 평가표를 설계해 놓고, 협업하라고 교육하는 모순입니다.
더 답답한 것은 이 조건을 쥔 사람조차 그 조건에 갇혀 있다는 점입니다. 타 부서와의 협업을 독려해야 할 리더 역시 자기 부문의 숫자로 위에서 평가받습니다. 분업의 성과는 명확히 측정되지만, 협업으로 막아낸 사고나 연결하느라 쓴 시간은 실적으로 잡히지 않고 비용으로만 청구됩니다. 잘 붙여놓았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협업은 검토와 같은 성격의 일입니다. 그래서 조건을 바꿀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조건을 바꾸면 본인 숫자가 나빠집니다.
사람이 아니라 제도에 물어야 합니다
"한국은 협업을 못하는가"라고 능력을 물으면 답은 늘 교육으로 귀결됩니다. 수많은 워크숍이 실패한 이유입니다. 애초에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구조를 향해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 무엇이 부서를 넘는 일을 손해로 만들고 있는가
- 어떤 불이익이 방어적 침묵을 만들고 있는가
- 지난 분기에 아랫사람의 말 때문에 바뀐 결정이 몇 건인가
전부 사람이 아니라 제도를 가리키는 질문이고, 제도는 누군가 결정하면 바뀝니다.
저는 지금 부서 경계가 없는 네 사람 조직에서 일합니다. 가로 경계가 없으니 남은 것은 세로뿐이고, 그 세로의 결정권은 제가 쥐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 결론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1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동료들이 계속 의견을 냅니다. 의견을 내면 실제로 제 결론이 바뀌니까요. 말해봐야 안 바뀐다는 판단이 말하면 바뀐다는 경험으로 뒤집히는 데 그만큼이 걸린 셈입니다.
조건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부서도 없는 네 사람 사이에서조차 그랬습니다.
제도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 방향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협업을 잘하게 된다는 것은 설득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설득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결론을 쥔 쪽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AI 시대에는 그 기록이 남습니다. 대화와 결정이 텍스트로 쌓이는 조직에서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고, 거꾸로 기록된 것은 개선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말로 무엇이 바뀌었는지는 더 이상 분위기가 아니라 조회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지난 분기에 협업을 통해 바뀐 결정이 몇 건인가. 앞에서 던진 이 질문은 곧 답이 나오는 질문이 됩니다. 그 숫자가 늘어나는 조직이 더 빨리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