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해보라는 말이 어려운 이유
회사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시킨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끝내는 법이고, 그러다 알아서 해보라는 말이 오면 멈춥니다. 문제를 내본 적이 없어서이고, AI가 먼저 가져가는 것도 시킨 일을 잘하는 쪽입니다.
회사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시킨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끝내는 법입니다. 그걸로 인정받고, 다음 일을 받습니다. 그러다 몇 해쯤 지나면 "이번엔 알아서 한번 해보세요"라는 말이 옵니다. 시키는 일은 누구보다 잘하던 사람이 멈춥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를 내본 적이 없어서입니다. 그리고 AI가 먼저 가져가는 것도 정확히 시킨 일을 잘하는 쪽입니다.
출제자만 바뀝니다
학교에서 12년 동안 푼 문제는 전부 남이 낸 문제였습니다. 그 안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잘합니다. OECD가 2022년에 처음 잰 PISA 2022 창의적 사고 평가에서 한국은 64개국 가운데 싱가포르 다음이었는데, 그 평가가 재는 것은 주어진 과제 안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남의 아이디어를 고치는 능력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출제자가 냅니다.
회사에 들어가면 출제자가 선생님에서 상사로 바뀝니다. 구조는 같습니다. 일은 위에서 내려오고, 처음 몇 해의 평가는 그 일을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끝냈느냐로 매겨집니다. 그 시기에 문제를 스스로 내볼 자리는 거의 없습니다. KDI 국제정책대학원 박진 교수는 OECD 국제성인역량조사를 두고 "2013년 조사에서도 우리 젊은이의 과업에 대한 재량, 학습의지 모두 OECD 바닥권"이었다고 적었습니다. 학교도 회사도 문제를 내는 연습을 시킨 적이 없는데, 어느 날 "알아서 해보라"는 말이 오는 것입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그 자리에서 시험받는 셈입니다.
시킨 일을 잘하는 능력이 먼저 겹칩니다
AI는 문제가 주어지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풉니다. 그 문제가 자기 범위 안인지 밖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남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경계가 어디인지 아는 일과, 어떤 문제를 낼지 정하는 일입니다. 앞의 것은 검토는 만드는 것보다 어렵습니다에 적었습니다.
여기서 불편한 사실이 나옵니다. 처음 몇 해에 가장 인정받던 능력, 시킨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끝내는 능력이 AI가 가장 먼저 잘하게 된 능력과 겹칩니다. 예전에는 그 능력만으로 몇 해를 버티며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문제를 내는 능력은 길러본 적이 없는데, 남는 일이 그것입니다.
멈추는 것이 정상입니다
"알아서 해보세요"라는 말이 어려운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권한과 책임이 늘어서 어려운 게 아닙니다. 목표 없이 재량만 왔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피터 워는 1987년 Work, Unemployment, and Mental Health에서 일의 조건을 비타민에 비유했습니다. 재량은 비타민 A나 D 같아서 모자라면 해롭지만 일정량을 넘어도 해롭습니다. "알아서 해보라"는 말은 대개 무엇을 위해서인지, 어디까지가 내 일인지 없이 옵니다. 그것은 위임이 아니라 모호성이고, 그 앞에서 멈추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저는 지금 시키는 사람 없이 매주 무언가를 만드는데, 해방감과 같은 크기의 불안이 있습니다. 오늘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일이 만드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목표를 스스로 세워야 하는 자리에 처음 선 사람이 느끼는 당연한 무게라고 생각합니다.
시킨 일 안에서 문제를 내봅니다
회사의 조건을 바꿀 권한이 없는 자리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시킨 일 안에서 문제를 내는 것입니다.
- 시킨 일이 무슨 문제를 푸는지 묻습니다. 일을 받을 때 "이건 어떤 문제를 풀려는 건가요"를 한 번 확인하는 것이 문제를 내는 첫 연습입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짐작하던 자리에서 의도를 직접 듣는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 시킨 일에 조건 하나를 얹습니다. 시킨 대로 끝낸 뒤 "이렇게도 해봤습니다"를 하나 붙입니다. 이 행동에는 이름도 있습니다.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와 제인 더튼이 2001년에 Crafting a Job: Revisioning Employees as Active Crafters of Their Work에서 잡 크래프팅이라 불렀습니다. 직무를 받는 사람이 그 직무의 과업과 경계를 스스로 고쳐 쓴다는 뜻입니다.
- 크기를 줄입니다. 저는 문제의 크기를 2시간 단위로 쪼갰습니다. 출제자가 되는 연습을 가장 작은 단위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 0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남이 낸 문제, 만들어진 양식을 가져다 한 줄을 바꾸는 것이 첫 연습입니다. 남의 프롬프트에서 조건 하나를 바꾸는 순간 그 문제는 반쯤 내 것이 되고, 출제자의 의도 밖으로 처음 나가보게 됩니다.
시킨 일을 잘하는 능력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그 위에 문제를 내는 연습이 얹힐 뿐입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은 타고나지 않습니다. 회사가 그 자리를 만들어주면 가장 좋고,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시킨 일 안에서 가장 작은 문제부터 내봅니다. 그 자리를 회사가 어떻게 만드는지는 다음 편에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