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로롱
AX11

AI를 쓰지 않기 위해 AX합니다

AI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사람이 할지 결정하기 위해 전환합니다

AI를 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AI 시대는 옵니다. 저 역시 AI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이 역설적인 문장을 제목으로 고른 이유는, AX가 왜 필요한지가 이 한 문장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AX는 AI에게 일을 맡기기 위한 전환이 아닙니다.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을 사람이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전환입니다. AI가 더 잘하는 일을 사람이 억지로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고, AI가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의 자리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목적은 인간을 AI보다 뛰어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AI를 쓰면서도 인간이 무엇을 위해 일하고 무엇을 만들고 어떤 가치를 고를지 스스로 정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글은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순서대로 따라갑니다. 일자리는 정말 사라지는가. 사라진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지킨다면 왜 인간이어야 하는가.

흔들리는 전제

지금까지의 통념은 이랬습니다. 기술이 직업을 없애면 새 직업이 생기고, 사람을 재교육하면 되고, AI를 잘 쓰는 사람이 되면 된다. 이 논리는 한 가지 전제 위에서만 작동합니다. AI가 인간보다 잘하는 영역은 제한적일 것이다. 그 전제가 지금 흔들립니다. 얼마나 흔들리는지가 가장 크게 갈리는 논점이라, 흔들린다는 쪽부터 보겠습니다.

국제노동기구의 Employment and Social Trends 2026에 따르면 세계 실업률은 4.9%에 고정된 채 1억 8,600만 명이 실업 상태이고, 3억 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일을 하면서도 하루 3달러 미만으로 삽니다. 성장이 일자리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사다리의 첫 칸입니다. 세계경제포럼의 Artificial Intelligence and the Future of Entry-Level Work에 따르면,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노동자 셋 중 하나(37%)가 AI로 업무가 크게 바뀌는 직군에 있고, 어떤 지역에서는 넷 중 셋입니다. 초급 노동자의 28%는 지금 가진 기술의 절반도 3년 뒤에는 유효하지 않을 거라고 답했습니다. 경력의 입구가 좁아지면, 새 직업이 생겨도 거기 도달할 길이 사라집니다.

일을 남겨주자는 제안들

그래서 지금 가장 진지한 사람들이 내놓는 답은 "인간에게 일을 남겨주자"입니다.

아세모글루가 오터, 존슨과 함께 브루킹스에 낸 Building Pro-Worker Artificial Intelligence는 기술을 노동 증강, 자본 증강, 자동화, 전문성 평준화, 새 과업 창출의 다섯 갈래로 나누고, 그중 확실하게 친노동적인 것은 인간의 새로운 전문성을 만들어내는 기술뿐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AI가 자동화 쪽으로만 내달리는 건 기술의 본성이 아니라 시장의 왜곡된 인센티브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빌 게이츠는 한 걸음 더 나갑니다. A Turbulent AI Era and Critical Choices to Make에서 그는 사람을 고용하면 급여세를 내지만 로봇을 사면 비용 처리로 세금을 아끼는 비대칭을 지적하며 로봇세를 제안했고, 자연보호구역처럼 특정 직업을 아예 인간에게 남겨두자는 "직업 보전(Human Reserved)" 구상을 내놓았습니다. 돌봄과 배심원이 후보입니다.

셋 다 존중할 만한 제안입니다. 그런데 셋 다 같은 질문 앞에서 멈춥니다.

제안하는 일남는 질문
친노동적 AI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기술을 유도한다AI가 모든 지적 노동에서 앞서게 되면 성립하지 않는다
로봇세대체의 속도를 늦추고 전환 비용을 마련한다속도를 늦출 뿐, 방향은 바꾸지 못한다
직업 보전특정 일을 인간에게 법으로 남긴다왜 인간이 해야 하는가에는 답하지 않는다

AI가 진단을 더 정확히 하고 글을 더 잘 쓰게 된 뒤에도 "그래도 인간이 하게 합시다"라고 정하는 순간, 우리는 사람에게 일부러 열등한 방식을 강요하는 사회를 만들게 됩니다. 과도기의 방어로는 필요할지 몰라도 문명의 답은 아닙니다.

과장이라는 반론

반대편에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장 뚜렷한 목소리는 앤드류 응입니다. 그의 반론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AI 공포는 오픈소스와 경쟁하기 싫은 대형 기술기업이 규제를 끌어오려고 부풀린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의 AI발 감원은 과장됐고 많은 직무에서 AI가 할 수 있는 건 당분간 30~40%, 나머지는 사람이 해야 하므로 자동화되지 않은 쪽의 값은 오히려 오른다. 셋째, 사람의 지적 과업을 전부 해내는 AI는 여전히 수십 년 뒤다. 앞의 통계도 초급 직무의 변화를 재기는 하지만 그 원인이 AI라고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그의 말이 맞다면 지금 급한 건 직업 보전이 아니라 적응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무엇이 남느냐"에 그가 내놓는 답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는 사람이 오랫동안 맥락의 우위를 가질 거라고 말합니다. 조직과 고객과 말해지지 않은 규칙에 대해 쌓아온 암묵지가 있어서, AI가 내놓은 안들 중 무엇이 이 상황에 맞지 않는지를 사람은 즉시 안다는 겁니다. 흔히 취향이나 판단력, 직감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가 그 축적된 맥락이라고 그는 봅니다.

저도 앤드류 응 교수님의 의견에 가깝지만, 사람의 우위는 맥락을 넣어주는 날까지입니다. 그리고 암묵지를 만들려는 AI 연구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성과가 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았습니다. 시기가 언제가 되었든, 일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남는 자리는 어디인가.

일이 대답해 온 질문

처음 만난 사람에게 우리는 거의 자동으로 묻습니다. "무슨 일 하세요?" 이 질문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회에 어떤 경제적 가치를 생산합니까?

일 = 소득 = 사회적 가치 = 자존감 = 존재 의미. 농업사회부터 지금까지 이 등식은 한 번도 진지하게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먼저 오는 것은 AI와 일하는 소수가 나머지보다 훨씬 많이 생산하는 단계입니다. 그건 역사에서도 겪어본 불평등이라 재분배와 교육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고, 등식은 아직 버팁니다. 그런데 AI가 경제적 가치의 대부분을 인간보다 잘 생산하게 되면 무너지는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이 등식 전체입니다. 그때 "무슨 일 하세요?"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됩니다. 그 전에 등식을 풀어둬야 합니다.

생존과 기여와 의미를 분리하기

등식을 푸는 방법은 묶여 있던 세 가지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이 분리를 가장 오래 이야기한 사람은 앙드레 고르입니다. 그는 『Reclaiming Work: Beyond the Wage-Based Society』(1999)에서 싸워야 할 대상은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야만 먹고살 자격이 생긴다"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건 반길 일이고, 소득은 노동에서 떼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게으름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시켜서 하는 일을 없애려 했습니다.

생존: 일을 못 해도 먹고살 수 있는가. 기본소득이 첫 답이지만, 돈의 문제를 풀어도 의미의 문제는 남습니다. 그래서 현금 대신 주거·의료·교육·교통 같은 필수 인프라를 직접 보장하자는 보편적 기본 서비스(UBS) 제안이 나옵니다.

기여: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좋은 것을 만들어주고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시장가치일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공동체를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환경을 지키는 일. 경기도가 2023년부터 실험 중인 기회소득이 이 방향의 초기 형태입니다. 시장이 값을 매기지 않는 활동에 공공이 보상하는 제도로, 예술인과 장애인에서 시작해 아동돌봄·기후행동까지 넓어졌습니다.

의미: 나는 왜 사는가. 이건 경제학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산에서 해방될수록 이 질문은 커집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단에 제 생각을 적어두겠습니다.

노동과 작업이 떠난 자리

고르가 제도를 말했다면, 그보다 앞서 지도를 그린 사람은 한나 아렌트입니다. 『인간의 조건』(1958)에서 그는 인간의 활동을 셋으로 나눴습니다.

  • 노동(labor): 생존을 위해 반복되는 활동. 산업혁명이 기계에 넘겼습니다.
  • 작업(work): 도구·지식·예술처럼 남는 것을 만드는 일. 지금 AI가 넘겨받는 중입니다.
  • 행위(action): 사람 사이에서 말하고, 연대하고, 어떤 세계를 만들지 정하는 일.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마지막 층입니다.

산업혁명이 인간을 육체노동에서 해방시켰다면, AI는 지적 작업에서 해방시키고 있습니다. 남는 것은 행위입니다. 심리학이 말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 셋, 스스로 정하는 것(자율성), 쓸모를 확인하는 것(유능성), 연결되는 것(관계성)도 전부 이 층에 삽니다. 일이 사라져도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아렌트 본인은 이 해방을 축복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노동에서 풀려나려는 것은 노동자의 사회인데, 그 사회는 그 자유를 쓸 만한 더 높은 활동을 모른다는 것이 서문의 경고였습니다. 저는 한나 아렌트의 분류법은 차용하되 결론은 다른 쪽으로 갑니다. 모르는 것이라면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누가 생산수단을 갖는가

이 전환이 저절로 좋은 쪽으로 흐르지는 않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분명합니다. 소수가 AI를 소유하고, 나머지는 기본소득을 받아 소비만 하고, 사회는 "일하지 않아도 되잖아"라고 말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무기력해지는 미래. 갈림길은 AI가 얼마나 발전하느냐가 아니라 그 생산력을 누가 쓸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반대 방향도 이미 열리고 있습니다. 모델은 오픈소스로 풀리고, 지능의 값은 해마다 떨어집니다. 한 사람이 AI 에이전트 여럿을 부리며 예전 같으면 회사 하나가 하던 일을 혼자 해내는 게 지금도 가능합니다. 그 방향이 이긴다면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생존을 위해 남의 생산수단에 자신을 팔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그때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생산능력이 아니라 다른 데서 나옵니다.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마지막에 남는 것

AI가 분석하고 쓰고 그리는 시대에 인간의 마지막 고유성으로 흔히 창의성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AI는 창작도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도 남는 것이 있습니다. 취향입니다.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이 아름다운가. 어떤 세계를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 이 질문들에 AI는 통계적 확률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대답할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 풀린 사회에서 취향은 소수의 사치가 아니라, 공동체가 어디로 갈지를 정하는 공동선이 됩니다. 앞에서 미뤄둔 의미의 질문도 여기서 풀립니다. 나는 왜 사는가는 결국 나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AX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X는 AI를 업무에 끼워 넣는 기능적 전환이 아닙니다. 노동과 작업이 기계로 넘어간 뒤에도 인간이 존엄을 지키며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미리 설계해 두는 일입니다. 기여, 행위, 취향입니다.

이 설계를 누가 대신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접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겪어보지 않으면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없어서, 만들면서 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이 홈페이지는 그 과정의 기록입니다.

AI를 잘 쓰기 위해 AX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AI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일을 찾기 위해 AX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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