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로롱
일과 성장6

일을 빨리 끝내는 사람의 다음 단계

일을 빨리 끝내게 됐다면 그 일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물어볼 차례입니다. 목적을 묻고, 필요한 근거를 고르고, 판단을 제안하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두 시간 걸리던 주간 보고서 초안을 AI로 30분 만에 완성했습니다. 숫자도 확인했고 마감도 지켰습니다.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고, 다음 주에는 다른 보고서도 하나 맡았습니다. 처리하는 일은 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들지, 왜 만드는지, 어디까지 하면 되는지를 정하는 사람은 여전히 따로 있습니다.

일을 빨리 끝내는 능력은 중요합니다. 다만 그 능력이 생겼다고 맡는 역할까지 저절로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주어진 일을 잘하게 됐다면, 이제는 그 일이 어디에 쓰이는지 묻고 어떤 결과가 필요한지 제안하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보고서 하나도 그 연습의 출발점이 됩니다.

일을 잘하게 됐는데 맡는 역할은 그대로입니다

처음 일을 맡으면 정해진 양식을 채우는 것도 어렵습니다.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숫자가 맞는지 확인하고, 마감에 맞춰 제출하는 법을 배웁니다. 반복하다 보면 점점 빨라집니다. AI를 쓰면서 일부 과정이 더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속도를 높인 뒤의 목표가 계속 더 많이 처리하는 것뿐이면, 배우는 범위도 그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보고서 다섯 건을 쓰는 사람에서 열 건을 쓰는 사람이 되지만, 그 보고서로 회사가 무엇을 결정하는지는 여전히 모를 수 있습니다.

AI 연구에서도 업무의 속도와 구성은 따로 움직입니다. Microsoft 연구진 등이 진행한 Shifting Work Patterns with Generative AI는 66개 기업의 지식노동자 7,137명을 대상으로 한 현장실험입니다. 연구진은 도구를 사용한 사람들의 이메일 시간이 주당 약 두 시간 줄었다고 추정했지만, 수행한 업무의 종류나 양에서는 뚜렷한 변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 연구가 개인의 성장을 측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도구로 시간을 아끼는 것과 일의 구성이 달라지는 것이 별개의 변화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제가 생각하는 다음 연습이 있습니다. 익숙한 일을 더 빨리 만드는 연습에, 그 결과를 받는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연습을 더하는 것입니다. 같은 보고서를 쓰더라도 배우는 것은 달라집니다.

그 자료가 어디에 쓰이는지 묻습니다

주간 매출 보고서를 부탁받았다고 해봅니다. 평소처럼 지난주 파일을 열면 자연스럽게 양식부터 채우게 됩니다. 매출을 넣고, 그래프를 바꾸고, 증감률을 계산합니다. 지난해부터 있던 항목은 이번에도 들어갑니다.

작업 전에 질문 하나를 더해봅니다.

“이번 자료로 무엇을 결정하려는 건가요?”

팀장의 답이 “다음 주에 어느 고객군에 집중할지 정하려고 합니다”라면 필요한 정보가 달라집니다. 전체 매출 합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고객군별로 매출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변화가 일시적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같은 숫자라도 쓰임을 알고 보면 질문이 생깁니다. 매출이 줄어든 고객군을 회복하는 데 집중할지, 늘어나는 고객군에 힘을 더 실을지. 보고서는 그 선택을 돕는 자료가 됩니다. 어떤 표를 넣을지 정할 때도 “지난번에 있었으니까” 외의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상대도 목적을 바로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선택지를 좁혀 묻습니다. “전체 현황을 공유하려는 건가요, 다음 주에 집중할 고객을 고르려는 건가요?”라고 물으면 서로 생각한 일이 같은지 확인하기 쉽습니다.

물론 모든 보고서가 선택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기록을 남기거나, 문제가 생겼음을 알리거나, 정해진 의무를 이행하는 자료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기록의 정확성, 알림의 시점, 필수 항목이 기준이 됩니다. 목적을 묻는 것은 일을 없애기 위한 명분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한 장으로 충분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목적을 알았다면 필요한 결과를 제안해봅니다. 앞의 주간 보고서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 집중할 고객군을 정하는 자료라면, 고객군별 매출 변화와 그 이유, 제안 한 가지를 한 장에 정리하면 충분할까요?”

핵심은 한 장이라는 분량보다 무엇을 확실히 파악하겠다는 약속에 있습니다. 매출 변화는 어디를 살펴볼지 알려주고, 변화의 이유는 어떤 대응이 필요할지 판단하게 해줍니다. 제안은 그 판단을 다음 행동으로 연결합니다. 한 장에 담기 어렵다면 늘려도 됩니다. 필요한 정보를 줄여가며 한 장을 지키는 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다음은 설명을 위한 가상의 예시입니다. 전체 매출은 줄었지만 신규 고객의 구매는 비슷하고, 기존 고객의 재구매가 줄었다고 해봅니다.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을 수 있습니다.

구분보고서에 담을 내용
확인한 사실이번 매출 감소는 기존 고객의 재구매 감소에서 주로 나왔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재구매가 줄어든 이유는 매출 자료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제안하는 행동다음 주에는 재구매를 중단한 고객의 이유를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이 정도를 제안하려면 숫자를 옮기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신규와 기존 고객을 어떻게 나눴는지, 비교한 기간이 같은지, 예외적인 큰 주문이 있었는지도 봐야 합니다. 자료를 짧게 쓰는 일이 반드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엇을 남길지 판단하려면 그만큼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적는 것도 판단의 일부입니다. 재구매가 줄었다는 숫자만 보고 가격이 문제라고 결론내리면 할인부터 제안하게 됩니다. 이유를 아직 모른다고 적으면 먼저 확인할 일을 정할 수 있습니다. 좋은 제안은 확신하는 말투보다 사실과 추측의 경계가 분명한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안은 맡은 범위에서 본 것과 생각한 것을 근거와 함께 내놓는 일입니다. 결정권자가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판단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을 다른 사람도 쓸 수 있게 남깁니다

보고서를 받은 팀장이 “이 정도면 결정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했다면, 그 답에서 무엇이 도움이 됐는지 물어보고, 다음 보고서에 쓸 기준으로 남겨봅니다.

예를 들면 양식 맨 위에 이렇게 적을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다음 주에 집중할 고객군을 정하기 위한 자료입니다. 고객군별 변화와 필요한 근거를 담고, 확인한 사실과 추측을 구분합니다. 마지막에는 다음 행동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이 기준이 있으면 동료에게도 “지난주처럼 만들어주세요”보다 구체적으로 일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표의 모양뿐 아니라 무엇을 위해 자료를 모으는지 알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가 더 좋은 비교 방법을 제안하면 그 기준도 함께 고칩니다.

나눌수록 전문성의 값이 오릅니다에서 기록으로 일을 넘기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록할 것에는 작업 순서뿐 아니라 판단의 이유도 들어갑니다. 어떤 자료를 찾았는지에 더해, 왜 그 자료가 필요했는지를 남기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는 다음 역할에서 쓸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목적을 설명하고, 일의 범위를 합의하고, 근거를 검토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능력입니다. 팀장이 되기 전에도 지금 맡은 보고서 하나에서 연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제안을 했다고 바로 권한이 생기거나 승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환경도 있고, 형식을 바꿀 수 없는 업무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양식 전체를 바꾸려 하기보다 정해진 보고서에 내 해석 한 줄을 덧붙여도 됩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범위에서 연습하되, 조직 전체가 바뀌지 않는 책임까지 혼자 질 필요는 없습니다.

판단 하나를 맡아봅니다

다음 보고서에는 내가 권하는 선택과 그 이유를 한 문장씩 덧붙여봅니다. 근거가 부족하다면 먼저 확인할 것을 적습니다.

제출한 뒤에는 실제로 어떤 결정에 쓰였는지 묻습니다. 내 예상과 달랐던 점을 다음 판단에 반영합니다.

일을 빨리 끝내는 능력 위에, 판단 하나를 맡아 결과까지 확인하는 경험을 쌓습니다. 맡을 수 있는 일의 범위는 그렇게 넓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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