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일해줄수록 사람이 더 지치는 이유
AI가 쉬운 일을 가져가면 하루에는 판단할 일만 남고, 여러 일을 한꺼번에 돌리면 쉬던 틈도 사라집니다. 지친 것은 의지가 아니라 하루의 구조입니다.
오후 다섯 시쯤이었습니다. 동료의 모니터에는 터미널 창이 세 개 떠 있었고, 창마다 AI가 코드를 쓰고 있었습니다. 동료가 의자를 뒤로 밀며 말했습니다. "토큰 다 떨어졌어요. 오늘은 더 못 하겠어요. 퇴근해요."
토큰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날 쓸 수 있는 AI 사용량을 다 쓴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 둘 중 하나로 읽습니다. 핑계이거나,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았거나. 저는 둘 다 아니라고 봅니다. AI는 한도가 차면 멈추고 다음 날 다시 채워집니다. 사람은 한도가 찼다는 표시가 뜨지 않습니다. 그날 먼저 바닥난 것은 토큰보다 사람 쪽이었습니다.
한 가지는 먼저 적어둡니다. AI가 피로를 덜어주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2025년에 나온 Use of Ambient AI Scribes to Reduce Administrative Burden and Professional Burnout에서는 진료 대화를 듣고 의무기록을 대신 써주는 AI를 30일 쓴 뒤, 외래 의료진의 번아웃 비율이 51.9%에서 38.8%로 내려갔습니다. 대조군이 없는 조사라 조심해서 읽어야 하지만, 귀찮은 일을 덜어낸 만큼 가벼워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은 AI를 쓰지 말자는 글이 아닙니다. 같은 도구가 어떤 하루는 가볍게, 어떤 하루는 더 무겁게 만드는데,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쉬운 일이 빠지면 판단만 남습니다
회사에서 보내는 하루에는 원래 머리를 덜 쓰는 일이 섞여 있었습니다. 자료를 옮겨 적고, 양식을 맞추고, 비슷한 코드를 한 번 더 쓰는 일입니다. 지루하다고들 했지만, 돌아보면 그 시간이 머리가 쉬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결정 하나를 내리고 나면 손만 움직이는 일을 하면서 다음 결정을 준비했습니다.
AI가 먼저 가져가는 것이 바로 그 일입니다. 남는 것은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만들어진 것이 맞는지 보고, 틀렸으면 어디가 틀렸는지 찾는 일입니다. 검토는 만드는 것보다 어렵습니다에서 썼듯, 남이 만든 것을 판단하려면 그것을 처음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쉬던 자리가 빠지고 나면 하루가 그런 일로만 채워집니다.
실행비용이 저렴해질수록 목표가 비싸집니다에서 AI가 실행을 가져갈수록 사람에게는 판단이 남는다고 썼습니다. 그 말은 지금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글에서 덜 말한 것이 있습니다. 판단은 값이 오르는 일인 동시에, 사람을 가장 빨리 지치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쉬던 틈이 먼저 사라집니다
UC 버클리 하스의 연구자들이 200명 규모의 기술 회사를 8개월 동안 지켜보고 쓴 AI Doesn’t Reduce Work—It Intensifies It(2026)에도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회의 직전에, 저녁에 떠오른 것을 AI에게 보냈고, 원래 쉬는 틈이던 시간이 일로 채워졌습니다. AI 여러 개를 동시에 돌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랬습니다. 시작하는 데 드는 수고가 줄자, 멈출 이유도 같이 줄었습니다.
여러 개를 한꺼번에 돌리면 더 지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2009년 연구 Why is it so hard to do my work? The challenge of attention residue when switching between work tasks에 따르면, 끝내지 않은 일에서 다른 일로 옮겨 가면 주의의 일부가 앞의 일에 남고, 그래서 다음 일을 더 못합니다. AI에게 맡긴 일은 대부분 끝나지 않은 채 기다리는 일입니다. 창 세 개를 오가는 동안 머리는 세 곳에 조금씩 걸려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개발하고,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한꺼번에 돌리는 날이 있습니다. AI 덕분에 셋 다 굴러가는 날인데, 그런 날일수록 저도 그 동료와 같은 말을 하고 싶어집니다.
AI 여럿에게 일을 나눠 맡기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과 닮았습니다. 맡긴 수만큼 돌아오는 것이 있고, 돌아온 것마다 판단해야 합니다. 팀장이 되면 지치는 이유와 같은 구조가, 이제는 사람 하나가 앉은 책상 위에서도 생깁니다.
맡긴 만큼 속이 빕니다
피로보다 늦게 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올해 1월 Anthropic이 발표한 How AI assistance impacts the formation of coding skills는 개발자 52명에게 처음 보는 라이브러리로 과제를 하게 했습니다. AI를 쓴 쪽이 눈에 띄게 빨리 끝낸 것도 아니었는데, 끝난 뒤 그 라이브러리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묻는 시험에서 AI를 쓴 쪽은 50%, 직접 짠 쪽은 67%를 받았습니다. 같은 AI를 써도 개념을 물어가며 쓴 사람들은 점수가 높았고, 코드를 통째로 맡긴 사람들이 가장 낮았습니다.
일이 끝나는 것과 내 안에 남는 것은 따로 움직입니다. 통째로 맡긴 날은 일은 끝났는데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날이 쌓이면 판단할 근거가 비어 가고, 근거가 빈 채로 판단하면 매번 처음부터 따져야 해서 더 지칩니다. 피곤한 것과 속이 비는 것은 따로 오지 않고 서로를 키웁니다.
우리 팀이 한 것
그날은 일단 쉬었습니다. 더 할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다. 멈추라는 신호가 왔을 때 그 신호를 의지의 문제로 바꾸지 않는 것이 첫 번째였습니다.
그다음에는 토큰을 아껴 쓰는 방법을 서로 나눴습니다. 아직 시험 중입니다. 제가 보기에 토큰을 아끼는 방법은 대부분 맡기기 전에 생각을 먼저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적고, 한 번에 하나씩 맡기면 AI가 헛도는 일이 줄고, 돌아온 것을 판단하는 횟수도 줄어듭니다. 토큰을 아끼는 일과 사람을 아끼는 일이 같은 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책을 권하고 있습니다. 속이 비지 않도록요. AI가 일을 끝내주는 날에도 내 안에 쌓이는 것은 따로 챙겨야 합니다. 책은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방법입니다. 모니터에서 한 발 떨어져, 누군가 오래 붙든 생각을 천천히 따라가 보는 시간입니다. 판단만 하던 머리가 거기서 쉬고, 다음 판단에 쓸 근거도 거기서 채워집니다.
하루에 판단할 양을 정합니다
AI가 일해주는 하루는 저절로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쉬운 일이 빠진 만큼 쉬는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야 하고, 판단할 일이 몰리는 만큼 그 양을 정해야 합니다. 오늘 할 것은 셋입니다.
- 동시에 돌리는 일의 수를 정해둡니다. 새 창을 열고 싶어지면 하나를 끝내고 엽니다. 끝낸 일은 머리에 덜 남습니다.
- 맡기기 전에 원하는 것을 세 줄로 적습니다. 무엇을, 왜, 어디까지. 토큰도 아끼고, 돌아온 것을 볼 기준도 생깁니다.
- 하루에 한 번은 AI 없이 속을 채우는 시간을 둡니다. 책 한 장이어도 되고, AI가 짜준 코드 한 부분을 내 말로 설명해보는 것이어도 됩니다.
토큰은 내일이면 다시 찹니다. 사람은 쉬어야 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