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비용이 저렴해질수록 목표가 비싸집니다
남는 일은 목표를 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사람이 원래부터 잘 못하던 일입니다.
AI가 실행을 가져가면 목표를 정하는 일이 인간에게 남는다는 말은 이제 자주 들립니다. 저도 그 방향이 맞다고 봅니다. 다만 이 말이 위안처럼 쓰이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목표를 정하는 일은 AI가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조직이 가장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원래 잘하던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윗줄로 올라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토마스 베델보르는 2017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쓴 Are You Solving the Right Problems?에서 17개국 91개 회사의 경영진 106명에게 물었습니다. 85퍼센트가 자기 조직이 문제를 진단하는 일을 잘 못한다는 데 동의했고, 87퍼센트가 그 결함이 상당한 비용을 낳고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자기 조직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자기 조직이 무엇을 풀어야 하는지 고르는 일을 못한다고 답한 것입니다.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인사에서 본 장면들이 겹쳤습니다. 조직 개편의 목적을 물으면 대답이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새 제도를 도입하는 이유를 물으면 "위에서 정했다"는 답이 제일 많았습니다. 문제를 정의하는 자리는 늘 비어 있었고, 아무도 그 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문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실행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입니다.
실행이 산더미일 때는 그 결핍이 안 보입니다. 바빴으니까요. 실행이 빠르고 저렴해지면 그 핑계가 사라집니다.
그럼 목표도 맡기면 되는가
여기서 흔히 나오는 대답이 있습니다. 실행은 맡기되 목표는 인간이 정해야 한다, 목표는 알고리즘의 출력이 아니라 의지의 선언이다 같은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쓰고 싶었는데, 연구를 보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로크와 라담이 40년치를 정리한 Building a practically useful theory of goal setting and task motivation: A 35-year odyssey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남이 정해준 목표라도 그 목표의 목적이나 근거를 함께 주면, 본인이 참여해 정한 목표만큼 잘 작동합니다. 반대로 설명 없이 무뚝뚝하게 ("이거 하세요") 던지면 성과가 유의하게 낮아집니다.
즉 목표를 누가 처음 꺼냈는지는 결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유가 같이 왔는가였습니다. 그렇다면 AI가 목표를 제안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데이터에서 병목을 찾아내고 이번 분기에 무엇을 걸어야 할지 제안하는 일은 잘할 수 있고, 이유도 훌륭한 문장으로 붙여줍니다.
문제는 그 이유가 설명이지 근거가 아닐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근거를 댈 때는 책임도 함께 옵니다. 틀린 목표를 걸었던 사람이 다음 분기에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무엇을 잘못 봤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AI가 만든 이유는 문장으로는 더 매끄럽지만 책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문장이 매끄러울수록 책임소재가 비었다는 사실이 안 보입니다.
남는 일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 채널에서 검토는 만드는 것보다 어렵습니다를 쓴 적이 있습니다. AI가 만드는 일을 가져가면 검토가 남는데, 검토는 만드는 일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 더 어려운 일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목표도 같은 구조입니다. 실행의 상당부분을 AI가 가져가면 목표를 정하는 일이 남는데, 그것은 실행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영진 열 명 중 여덟이 자기 조직이 못한다고 답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연습으로만 늘어납니다. 문제를 내본 적이 없으면 문제를 낼 줄 모른다는 이야기를 알아서 해보라는 말이 어려운 이유에 적었는데, 조직 안의 개인에게 해당하는 그 이야기가 조직 자체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목표를 계속 남에게 받아온 조직은 목표를 정하는 근육이 없습니다. 그 조직이 AI에게 목표까지 받기 시작하면, 받는 상대만 바뀌고 근육은 계속 안 생깁니다.
틀린 목표의 값이 오릅니다
목표가 비싸진다고 한 것은 이런 뜻입니다.
목표 하나의 값은 그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실행의 양만큼입니다. 같은 한 달에 예전의 몇 배를 실행할 수 있게 되면, 잘 고른 목표가 벌어오는 것도 몇 배지만 잘못 고른 목표가 버리는 것도 몇 배입니다. 실행비용이 저렴해질수록 목표가 비싸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비싼 일을, 조직은 원래부터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남길까
실행을 AI에게 넘기기 전에, 저는 목표 한 줄마다 세 칸을 사람이 채워두려 합니다.
- 이름: 이 목표를 걸자고 한 사람. 제안은 AI에게 받아도 됩니다. 다만 다음 분기에 그 자리에 앉아 무엇을 잘못 봤는지 설명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름이 없으면 아무리 근거가 길어도 무뚝뚝하게 던져진 목표와 같아집니다.
- 이유: 왜 이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고르지 않았는지. 판단은 고른 것보다 버린 것에 더 많이 담깁니다. 버린 것을 적어두지 않으면 실행이 빨라질수록 버린 것이 하나씩 다시 올라옵니다.
- 멈출 조건: 무엇을 보면 이 목표를 바꾸는지. "2주 안에 재방문이 한 번도 안 늘면 이 목표를 다시 세운다" 같은 한 줄입니다. 실행이 느릴 때는 멈출 틈이 저절로 생겼지만, 이제는 미리 만들어둬야 합니다. 목표를 바꾸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결정이고, 무엇을 포기할지 정하는 일이라 한창 달리는 중에는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적습니다.
우리 팀이 분기 목표를 세우며 이유와 버린 것을 적고, 2주마다 목표를 바꿀지 보는 방식은 창업할 때 목표는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네 번의 대화로 만듭니다에 따로 적었습니다.
이 세 칸도 AI에게 채우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채웁니다. 그래도 사람이 적는 이유는 성능이 아니라 연습입니다. 앞에서 적었듯 목표를 정하는 일은 연습으로만 늡니다. 세 칸을 직접 채우는 것이 그 연습이고, 그것까지 넘기면 조직은 목표를 정하는 근육을 기를 마지막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실행이 싸진 조직에 비싼 것이 하나 남습니다. 무엇을 할지 정하는 한 줄입니다. 그 한 줄에 책임지는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는 한, 실행이 아무리 빨라져도 조직은 자기가 왜 그것을 하는지 압니다. AI를 쓰지 않기 위해 AX합니다에서 이 홈페이지의 전제로 적어둔 것이 이것입니다. 남겨둘 것을 먼저 정하고 나머지를 맡깁니다. 순서를 뒤집으면 남는 것은 남은 것이 아니라 미처 못 넘긴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