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로롱
AX7분

초안을 쓰던 자리가 배우는 자리였습니다

AI가 초안을 써주면 일은 빨라집니다. 그런데 초안을 쓰고 고쳐지던 시간은 회사에서 적힌 적 없는 것을 배우던 자리였고, 적힌 것으로 배운 AI는 그 자리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AI에게 맡길지 정할 때 "할 수 있나" 옆에 둘 질문 하나를 적습니다.

AI가 초안을 써주면 일이 빨라집니다. 그런데 초안을 쓰던 시간은 일만 하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처음 맡은 사람이 초안을 쓰고, 옆 사람이 고치고, 왜 고쳤는지 듣는 자리였습니다. 회사에서 배운 것 중 많은 부분이 거기서 왔고, 그중 대부분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은 그 자리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AI에게 일을 맡길지 정할 때 "AI가 할 수 있나" 옆에 어떤 질문을 하나 더 둘지 적습니다.

한 장면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팀을 옮겨 처음 월간 보고를 맡은 사람이 AI로 초안을 만듭니다. 지난달 보고서를 넣고 이번 달 숫자를 붙이면 몇 분 만에 그럴듯한 문서가 나옵니다. 팀장이 보기에도 고칠 곳이 적어 그대로 올라갑니다. 석 달이 지나고 회의에서 누가 묻습니다. "이 항목은 왜 지난달보다 줄었어요?" 보고서를 낸 사람은 답을 못 합니다. 숫자를 붙였을 뿐, 그 숫자가 어디서 오는지 따라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흔한 해석은 둘입니다. AI를 너무 믿었다. 더 공부해야 한다. 둘 다 그 사람에게 이유를 돌립니다. 저는 다르게 봅니다. 그 사람이 게을렀던 것이 아니라, 배우던 통로가 끊긴 것입니다.

회사에서 배운 것은 대부분 적힌 적이 없습니다

회사에서 배우는 것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적힌 것입니다. 규정, 양식, 매뉴얼, 지난 보고서. 다른 하나는 적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숫자는 그 부서에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이 표현은 이 상황에서는 안 통한다, 여기까지는 내가 정해도 되고 여기부터는 물어야 한다. 처음 보고서를 썼을 때 고쳐진 자리를 떠올려 보면, 대부분이 두 번째였을 것입니다.

인사에서 직무를 문장으로 옮기는 일을 한동안 했습니다. 직무를 적어두면 사람을 뽑고 평가하는 기준이 생기니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적어두고 나서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는 것과 적힌 것 사이에는 늘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66년에 마이클 폴라니가 『The Tacit Dimension』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썼습니다. 그가 든 예는 아는 얼굴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천 명 중에서 한 사람을 알아보지만 어떻게 알아보는지는 말하지 못합니다. 일도 비슷합니다. 숙련된 사람은 숫자가 이상하다는 것을 먼저 알고, 왜 이상한지는 나중에 설명합니다.

AI는 이 둘 중 앞의 것으로 배웠습니다. 글로 적힌 것, 적혀서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적힌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잘합니다. 지난 보고서의 형식을 따르고, 숫자를 문장으로 바꾸고, 빠진 항목을 채웁니다. 적히지 않은 것은 AI가 배운 자료에 없었고, 그래서 AI의 초안에도 없습니다. 그 부분은 여전히 사람이 사람 옆에서, 직접 해보고 고쳐지면서 배웁니다.

문제는 그 "직접 해보는" 자리가 초안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진출의 첫 칸은 이제 스스로 만듭니다에서 AI가 먼저 가져가는 것은 직업보다 초급 업무라고 썼습니다. 자료를 모으고 회의록을 쓰고 초안을 잡는 일입니다. 그 일이 사라질 때 같이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고쳐지던 시간, 적히지 않은 것이 옮겨가던 통로입니다.

연습을 대신해주면 시험에서 드러납니다

이 통로가 끊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실험이 있습니다. 2025년 PNAS에 실린 Generative AI without guardrails can harm learning: Evidence from high school mathematics는 고등학생 약 1,000명에게 수학 연습 시간에 AI를 쓰게 했습니다. 한 집단은 보통의 챗봇처럼 답을 바로 내주는 AI를, 다른 집단은 답 대신 힌트만 주도록 설계한 AI를 썼고, 나머지는 교과서와 노트로 연습했습니다.

답을 내주는 AI를 쓴 학생들은 연습 문제 점수가 AI 없이 연습한 학생들보다 48% 높았습니다. 그런데 AI 없이 치른 시험에서는 17% 낮았습니다. 힌트만 주는 AI를 쓴 학생들은 연습 점수가 더 많이 올랐는데도 시험에서는 손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연구진은 학생들이 AI를 지팡이처럼 쓴 것이 원인이라고 해석합니다. 짧은 기간의 결과라, 오래 쓰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 연구로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이 결과에서 가져오는 것은 하나입니다. 연습 문제는 답을 내는 자리가 아니라 배우는 자리였습니다. 답을 대신 내주면 연습 점수는 오르고 배움은 빠집니다. 회사의 초안도 같습니다. 초안은 결과물이기 전에 연습이었고, 고쳐지는 과정이 수업이었습니다. 코드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있어 AI가 일해줄수록 사람이 더 지치는 이유에서 소개했습니다. 처음 보는 도구로 과제를 하면서 코드를 통째로 맡긴 사람들이 끝난 뒤 그 도구를 가장 적게 이해했습니다.

맡겼을 때 돌아온 것과 돌아오지 않은 것

저도 한 번 그 자리를 건너뛰어 봤습니다. 첫 창업에서 개발을 외주에 맡겼습니다. 결과물은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것은 그 결과물을 알아보는 눈이었습니다. 무엇이 잘못 만들어졌는지, 방향이 어디서 틀어졌는지 저는 알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늦게 알았습니다. 8개월 만에 접었습니다.

2024년에 앱 개발 부트캠프를 다녔습니다. 그때 AI는 이미 코드를 써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직접 배우러 간 이유는 개발할 동료를 찾는 것과 함께, 개발을 제 눈으로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혼자 서비스를 만들 때 AI와 함께 만들고 프롬프트도 공개합니다. 그렇게 맡길 수 있는 것은 한 번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검토는 만드는 것보다 어렵습니다에서 쓴 대로, 틀린 것을 알아보려면 맞는 것을 알아야 하고 맞는 것은 대개 만들어본 사람만 압니다.

"AI가 할 수 있나" 옆에 둘 질문

AI에게 맡길지 정할 때 보통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AI가 이 일을 할 수 있나. 할 수 있으면 맡기고 없으면 사람이 합니다. 그런데 위 실험에서 AI는 연습 문제를 풀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할 수 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KAIST가 올해 8월에 밝힌 계획이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새 총장의 기자간담회를 전한 배충식 KAIST 총장 "승부수는 피지컬 AI"…전 교과목 AI 3단계 개편에 따르면, 2027년 3월부터 학부와 대학원의 모든 과목에 세 단계 중 하나가 붙습니다. AI를 사용하지 않는 교육, AI를 활용하는 교육, AI를 직접 설계하고 주도하는 교육입니다. 첫 단계가 있는 이유는 AI가 그 과목을 못 해서가 아닙니다. 총장의 말을 빌리면 "지금처럼 하면 숙제를 AI가 다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초를 배우는 중인 사람에게는 AI 없이 하는 칸이 따로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회사에는 이런 칸이 없습니다. 같은 일을 두고 누구는 AI에 맡기고 누구는 직접 하라고 정해주는 사람이 없고, 대개는 빠른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나 더 두자는 것입니다. 이 일을 AI가 할 수 있나, 그리고 지금 누가 이 일로 배우고 있나. 같은 월간 보고서라도 그 일을 5년 한 사람에게는 AI에 맡겨도 되는 일이고, 이번에 처음 맡은 사람에게는 한 번은 직접 써봐야 하는 일입니다. 일의 종류가 아니라 사람과 일의 관계가 기준입니다.

모든 초안을 직접 쓰자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배운 일, 배울 필요가 없는 일은 맡기는 것이 맞습니다. AI를 쓰지 않기 위해 AX합니다에서 쓴 대로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사람이 할지 정하는 것이 전환이고, 이 글은 그 기준에 줄 하나를 더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중인 일 하나는 남긴다.

이번에 처음 맡은 일에서 해볼 것

경력이 있어도 새 역할을 맡으면 그 일에서는 처음 하는 사람이 됩니다. 팀장이 되어 처음 쓰는 평가 의견, 처음 맡은 고객사의 첫 제안서, 처음 짜는 예산. 그 일에서 해볼 것을 적습니다.

  • 첫 초안은 직접 쓴다. 두 번째부터는 AI에게 맡겨도 됩니다. 다만 첫 번째를 직접 써야 두 번째부터 AI의 초안에서 무엇이 빠졌는지 보입니다.
  • AI에게는 초안이 아니라 그 다음을 맡긴다. 내 초안을 넣고 빠진 항목을 찾게 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써보게 해서 비교합니다. 위 실험에서 힌트만 준 AI가 손해를 막은 것과 같은 자리입니다.
  • 누가 내 초안을 고쳤다면 고친 이유를 한 줄 적어둔다. 고친 결과만 남기면 다음 초안에 그대로 반복됩니다. 이유를 적어두면 적히지 않았던 것이 하나 적힌 것이 되고, 나눌수록 전문성의 값이 오릅니다에서 말한 기록이 그렇게 쌓입니다. 다음 초안을 AI에게 맡길 때 그 한 줄을 같이 주면 AI가 본 적 없는 것이 됩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의 초안을 고치는 자리라면, 고친 이유를 한 줄 말해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같은 일을 합니다.
  • 석 달 뒤 AI 없이 설명해 본다. 그 보고서의 숫자가 어디서 오는지, 왜 이 항목을 이렇게 잡았는지를 누가 묻는다고 치고 답해봅니다. 답이 나오면 그 일은 이제 맡겨도 되는 일입니다.

AI가 초안을 가져간 뒤에도 회사에서 배울 것은 남아 있습니다. 적힌 적 없는 것들입니다. 다만 그것이 옮겨가던 자리가 초안이었으니, 그 자리를 아무 데서나 지우지 않는 일은 각자의 몫이 됐습니다.

지금 AI에게 맡기려는 그 일은 내가 이미 아는 일인가요, 아직 배우는 중인 일인가요.

댓글

로그인 없이 남길 수 있어요. 쓴 브라우저에서만 지울 수 있습니다.